나름 산을 좀 탄다 하는 사람들에게는 색다른 도전일 수도 있겠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아예 발길조차 들이고 싶지 않은 그곳을 모터사이클로 오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국 엔듀로 모터사이클의 대표선수인 이남기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자동차 레이스만큼이나 모터사이클 레이스도 종류가 무척이나 다양합니다. 당연히 온로드 레이스와 더불어 오프로드 레이스도 있죠. 대표적인 모터사이클 오프로드 레이스가 바로 다카르 랠리입니다. 이곳은 불혹의 나이를 바라보는 베테랑들조차 마지막 결승선에서 살아 남았음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고 마는 곳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다카르 랠리는 이 레이스에 비하면 고요하게 펼쳐지는 모터사이클 레이스일지도 모릅니다. 2주간 가로등도 없는 사막을 달리면서 겪을 고생을 단 몇 시간 만에 몽땅 겪을 수 있게 진하게 압축해놓은 레이스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하드코어 모터사이클 레이스인 하드 엔듀로(Hard Enduro)입니다. 그 중에서도 레드불의 고향인 오스트리아에서 펼쳐지는 에르츠버그 로데오는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고생스러운 일만 골라서 하는 하드코어 스포츠 마니아, 특히 하드코어 모터사이클 라이더들에게는 마치 성지순례의 마지막 지점과도 같은 레이스입니다.
터프 원, 레드불 루마니악스는 이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난이도를 지닌 레이스이며, 심지어 아예 이름 자체가 헬스 게이트 인 곳도 있습니다. 헬스 게이트…. 지옥의 문, 이 단어 하나 만으로도 하드코어 엔듀로 레이스가 어느 정도의 난이도인지 짐작이 갈 정도죠.
에르츠버그 로데오는 오스트리아 아이센에르츠 지역의 폐쇄된 철광산에서 개최되는데, 원래 이곳은 바퀴 하나가 자동차 두 대만한 크기의 메가 덤프 트럭들이 달리던 곳이었습니다. 산 하나를 사과껍질 깎듯 깎아냈기 때문에 높이도 높이지만, 메가 사이즈 덤프 트럭들이 다녀야 하기 때문에 경사진 계단 하나의 높이만 해도 거의 100m가 넘을 정도입니다.
게다가 산에서 캐낸 엄청난 크기의 바위들이 한 켠에 쌓여 있으며, 또 그만큼의 모래와 흙이 푹신푹신하게 깔려 있죠. 축축하게 젖은 숲과 그냥 걷기도 힘든 진흙탕까지…이곳은 한마디로 맨몸으로도 올라가기 힘든 곳입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사서 고생하는 곳만 골라가며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이곳은 이 세상에 둘 도 없는 놀이터이자 천국입니다.
레드불에서 후원하는 에르츠버그 로데오는 바로 어떤 이에게는 절대 가고 싶지 않은 곳, 하지만 다른 어떤 이들에게는 죽기 전에는 반드시 달려보고 싶은 그곳에서 개최되는 진정한 하드코어 엔듀로 모터사이클 레이스입니다.
전세계 각지에서 나름대로 모터사이클로 험로 좀 돌파해봤다 하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자신과 싸워보기를 희망하는데, 1850명의 예선전 참가자 중 단 500명만이 비로소 자신들의 지상 낙원에 발을 내디딜 수 있게 되죠.
본선이 시작되면 50명씩 10줄의 모터사이클 행렬이 서로 어깨를 부비적거리며 대기하는 진풍경이 펼쳐집니다. 레드불 에어레이스용 싱글 프로펠러 비행기가 출발 신호를 주면 10대의 모터사이클이 동시에 흙먼지를 뿜어내며 말도 안되는 경사와 높이의 계단으로 뛰어드는데, 이 광경을 보기 위해 그들만큼이나 사서 고생하기를 즐기고자 몰려든 사람들로 일대는 인산인해가 됩니다.
레이스가 펼쳐지는 풍경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레이스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아예 어떤 선수는 모터사이클에 타고 있는 시간보다 넘어지고, 구르며, 내려서 모터사이클을 끌고 가거나 심지어 계단과 바위 너머로 모터사이클을 집어 던지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정도입니다. 게다가 10대가 한꺼번에 달리기 때문에 지옥의 고행길로 밖에 보이지 않는 바위 길에서는 모든 라이더들이 진흙을 뒤집어쓰고 뒤엉켜 있기도 합니다.
전 구간을 다 통과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4시간. 하지만 이 시간 내에 들어오는 라이더는 단 1%도 되지 않습니다. 2015년 에르츠버그 로데오 본선에 출전한 500명 중 완주한 사람은 단 4명뿐입니다. 포디움에 오르거나 포인트를 획득한 사람들이 아니라 완주만 한 사람들이 네 명뿐이었습니다. 그 외 나머지는 시간을 훌쩍 넘겼거나 바위 틈에 끼어 빠져 나오지 못했거나, 아니면 모터사이클 고장이나 파손으로 완주를 하지 못했다는 거겠죠.
원래 엔듀로라는 장르 자체가 사서 고생하는, 말 그대로 다이 하드와 같은 모터사이클 레이스이기는 합니다만, 그 중에서도 에르츠버그 로데오는 가장 거칠고 가장 혹독하며, 가장 말이 안되는 레이스입니다. 아마 보통 사람이라면 왜 모터사이클로 이런 곳에 올라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니 애초에 이런 곳을 모터사이클로 달릴 수 있을 것이란 상상조차 하지 않으려 하겠죠.
하지만 이곳에서 팔 다리가 부러질 정도의 고통과 위험을 느끼고, 자기 키보다 더 큰 바위를 기어코 타넘어야만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이남기 선수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일본은 예전부터 이런 하드코어 엔듀로에 도전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다른 아시아권 국가에서는 도전하는 선수들 자체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작년에 이남기 선수가 이곳에 출전했을 때, 그리고 당당히 지옥의 문 앞에 설 수 있는 500명의 대열에 들었을 때, 많은 이들이 주목했습니다. 특히 이 경기를 주최하는 주최측이 많이 놀랐다고 하는군요. 그 덕분에 주최측으로부터 많은 배려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레이스에서 그에게 특혜를 준 건 결코 아닙니다.)
그는 이 분야에서 특히나 엔듀로 바이크의 불모지에 가까운 한국에서 아주 특별한 존재입니다. 마치 동계 스포츠 불모지에 가까운 우리나라의 봅슬레이 대표팀과 비슷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죠.
2014년 GS트로피 테스트라이더이기도 했으며, 이미 다양한 국내 엔듀로 대회에서 다수의 입상 성적을 보유하고 있고, 아카데미를 개설, 엔듀로 바이크 저변 확대를 위해 많은 일들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는 스스로 죽을 만큼 고생스러운 엔듀로 레이스에 목숨을 걸었다고 서슴없이 이야기합니다. 극한의 고통을 감수하면서 그것에 도전했을 때, 비로소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낀다고 할 정도죠. 이남기 선수는 2015년 에르츠버그 로데오에 도전하여 예선에서 287위의 성적으로 본선에 진출하였습니다.
아쉽게도 완주는 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실패했다고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고작 네 명의 선수만이 완주에 성공할 정도로 가혹하기 짝이 없는 이 레이스의 본선에 진출했다는 것, 그러니까 도전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전세계 모든 엔듀로 라이더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받아 마땅하니까요.
그는 이 경기를 마친 후 곧바로 레드불 루마니악스에 도전했습니다. 이 경기는 아예 시작부터 제대로 모터사이클을 탈 수 없게 말도 안 되는 장애물을 설치하는, 아주 고약한 경기 방식을 자랑합니다. 그는 이곳에서 유일한 아시아 선수였죠.
그렇다면 그가 꿈꾸는 마지막 성지는 어디일까요? 그것은 바로 5회 우승의 베테랑 시릴 디프리가 여전히 최강자로 버티고 있는 다카르 랠리입니다. 비슷한 듯 완전히 다른, 하지만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한다는 공통점을 지닌 그곳에 도전하면서 다시 한번 자신을 입증하려는 것이죠.
그럼 그가 이렇게 혹독한 고생을 기꺼이 감수하려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아마도 그건 다른 모터스포츠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극한의 상황에서 발현되는 끈끈한 동료애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다카르 랠리뿐만 아니라 하드코어 앤듀로에서는 이따금 경쟁상대를 끌어 올려주고 밀어주는 독특한 풍경이 연출되곤 합니다. 심지어 우승을 다투는 사람들끼리도 상대가 위기에 빠지면 바로 레이스를 멈추고 그를 위기로부터 탈출시켜줍니다.
자신을 믿어야 하며, 나아가 동료를 믿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뒷받침되어야만 주변과 나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다는 것. 위기의 순간에 궁극적으로 발휘되는 휴머니즘은 모두를 하나로 만들고 또한 나 자신 역시 살아 있음을 깨닫게 할 것입니다.
그의 도전으로 인해 앞으로 더 많은 엔듀로 애호가들이 늘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도 이남기 선수가 보고 느낀 것을 공유하고자 다양한 도전에 임하겠죠. 요즘 같은 세상에 어디에서도 느끼기 극한 상황에서의 뜨거운 감동. 살아 있음을 체감케 하는 환경. 이것만으로도 목숨을 걸어볼 가치는 충분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