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1
60년간 레이스카도 변했지만, 레이싱 수트도 변했습니다. 60년 전엔 과연 어떤 옷을 입고 레이스를 했을까요?
스포츠 선수들은 필드에 오를 때는 항상 유니폼을 입습니다. 팀의 소속감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오늘날 유니폼은 다양한 기능을 포함하고 있죠. 땀을 빨리 배출하거나 혹은 상대팀 수비수가 잡아 당겼을 때 특별히 더 많이 늘어나게 하는 기능들 말입니다.
어떤 스포츠에서는 좀 더 가볍고 얇게 만들기도 하지만, 또 어떤 스포츠는 더 단단하고 질기게 만들기도 하죠. 다 저마다 이유가 있는 디자인들입니다. 레이싱 수트도 마찬가지에요. 다만 조금 더 특별한 환경이기 때문에 좀 더 많이 신경썼고, 좀 더 많이 진화해왔다는 것만 다를 뿐입니다.
축구나 테니스를 하다가 옷이 불에 타는 일은 좀처럼 없을테니까요.
60년전 시작된 포뮬러1, 과연 그 때부터 지금까지 레이싱 수트는 어떻게 진화해왔을까요?
1950년대: 폴로셔츠에 면바지 그리고 얇은 가죽 모자
아마 오늘날 이렇게 입고 레이스카에 오르려하면 당장 트랙에서 쫓겨날거에요. 하지만 1951년에는 그리 이상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때까지만 해도 마땅히 레이싱 수트라 부를만한 옷이 없었으니까요.
마치 테니스나 폴로 선수들처럼 피케 셔츠를 입었고, 아래에는 조금 질긴 면소재의 바지를 입고 차에 올랐습니다.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지만, 이 당시 레이스카들은 요즘의 포뮬러1카보다 훨씬 더 불이 잘 붙었죠. 연료 탱크를 보호할만한 설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부딪혔다하면 빠르게 불이 붙었고, 그래서 드라이버들은 사고가 나면 보다 빨리 차에서 도망가려고 안전벨트도 메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모나코에서 사고를 당할 경우 바다로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죠.
헬멧도 마땅히 없어서, 얇은 가죽모자가 고작이었습니다. 마치 1~2차대전 파일럿처럼 가죽으로 된 헬멧에 고글을 썼죠. 그저 날아오는 돌멩이 정도만 막아줄 뿐이었습니다.
1960년대: 드디어 위 아래가 붙은 옷이 등장했습니다.
50년대에는 사실 어떤 옷을 입어도 딱히 제재를 가하지 않았습니다. 폴로셔츠든, 면 티셔츠든....그저 드라이버들이 편히 입을 수 있는 가벼운 옷이라면 뭐든 OK!
하지만 60년대로 접어들면서 드디어 위 아래가 붙은 옷이 등장했죠. 원래는 정비사들이 입던 일명 오버올(Overall)이었는데, 처음에는 편하다는 이유로 입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사고 차량에서 좀 더 쉽게 사람을 꺼낼 수 있다는 이유로 널리 보급되었죠.
1970년대초: 화염으로부터 보호받기 시작합니다.
60년대, 펑퍼짐했지만 꽤 그럴 듯해 보이는 오버올이 보급되었음에도 여전히 레이스카 화재로 화상을 입거나 사망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매 시즌마다 드라이버가 다치거나 사망하는 일이 생기자, 결국 화염으로부터 드라이버를 보호할 수 있는 옷이 등장했죠.
그리고 드디어 FIA도 방염복이라 부르는 레이싱 수트를 의무화했습니다. 당시 선정된 소재는 오늘날에도 방염소재로 쓰이는 노멕스입니다. 이 소재는 원래 우주비행사들의 훈련복에 쓰일 목적으로 개발된 것이었고, 가볍고 부드러우면서도 불에 잘 타지 않고, 열을 차단하는 기능이 있어 그 후로는 전투기 조종사들의 옷이나 장갑의 소재로 쓰였죠.
1976년: 그럼에도 심각한 부상자 발생
방염소재가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1976년, 뉘르부르크링에서 큰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녹색 지옥을 달리던 니키 라우다의 차량이 방호벽에 부딪혔고, 그대로 불이 붙는 사고가 발생했죠. 이 화재사고로 니키 라우다는 얼굴과 목 그리고 상체 부분이 3도 화상을 입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함께 쓰인 면소재 때문이었죠. 방염소재가 있었음에도 활동성과 흡습성을 유지하고자 면을 혼합해 사용했는데, 이게 불에 타면서 화상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1970년대 말: 우주복 소재를 가져다 씁니다.
이런 사고가 있은 후 다시 복귀한 니키 라우다 그리고 이를 목격한 마리오 안드레티는 더 진화된 방염 레이싱 수트가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또 다시 NASA에서 해답을 얻었죠. 우주비행사들이 입는 우주복에서 소재를 찾아냈고, 무려 5겹이나 겹쳐서 레이싱 수트를 만들었습니다.
분명 뛰어난 방염효과가 있긴 했지만, 문제는...굉장히 두껍고 움직임이 둔했다는 것이죠.
1980년대: 가볍고 부드러우며 더 화려해졌습니다.
둔해빠진 레이싱 수트는 10년 사이에 점점 더 얇아졌고, 뻣뻣했던 소재는 점차 부드러워졌습니다. 화학 섬유 기술이 그만큼 발전을 한 덕분이죠. 그래서 드라이버들은 시간이 갈수록 활동이 편하고 특히 통기성이 좋아 60도가 넘는 콕핏에서도 비교적(!) 쾌적하게 운전을 할 수 있게 됐죠.
물론 그럼에도 레이스를 마치고 나면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버리는 건 변함없습니다만...
그런데 이 시기에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바로 드라이버의 레이싱 수트가 굉장히 화려해졌다는 것입니다. 다름아닌 스폰서들의 로고로 장식되기 시작했으니까요. 대형 스폰서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로고가 TV에 비춰지길 원했고, 결국 헬멧과 드라이버의 수트에 이르기까지 로고들이 빼곡히 채워졌습니다.
물론 그만큼 더 많은 돈이 팀과 드라이버에게 지급됐고, 레이스는 더 풍성해졌죠.
1980년대 말: 내복이 생겼습니다.
가뜩이나 더운데 무슨 내복? 하겠지만, 이 내복 덕분에 하반신에 피가 몰리는 걸 상당히 방지할 수 있게 됐습니다. 브레이크를 할 경우 F1카는 드라이버의 몸무게에 약 4~5배에 달하는 중력을 전달하는데, 이 때 혈액도 함께 무게 중심 이동 방향으로 쏠립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다리로 피가 몰리게 되며, 이게 잦아지면 이내 다리에 기운이 빠져 브레이크 페달을 밟기가 어려워질 지경에 이르죠. 이 문제로 고심하던 알랭 프로스트는 전투기 조종사들이 높은 중력 가속도에 걸릴 때 신체를 압박하는 G수트라는 걸 입는다는 사실을 알았고, 궁여지책으로 여성용 스타킹을 신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이게 드라이빙에 도움이 된다는 걸 깨닿게 되면서 방염소재로 만들어진 압박 내의가 등장했죠.
1994년: 피트 크루들도 똑같은 옷을 입게 됐습니다.
레이싱 드라이버들이 가장 많은 위험과 직면하기 때문에 그들을 중심으로 수트가 진화했지만, 피트에서도 수많은 화재사고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뜨겁게 달아오른 엔진으로 연료를 보급하다가 그만 배기열에 유증기가 폭발하면서 큰 화재가 일기도 했죠.
결국 1994년부터 피트 크루들도 레이싱 드라이버들처럼 레이스를 할 때엔 동일한 소재의 방염 수트를 입어야 한다는 규정이 마련되었고, 오늘날 피트 크루들은 드라이버와 똑같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방염 내의 방염 수트, 헬멧, 부츠, 장갑을 착용하고 업무에 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더 가볍고 더 쾌적하며, 더 근사하게!
오늘날 레이싱 드라이버의 수트는 1980년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볍습니다. 5겹이나 겹쳐서 만들었던 때와 달리 더 얇아졌으며, 그래서 통기성도 더 뛰어나죠.
노멕스는 여전히 유효한 소재이지만, 예전보다 더 엄격한 심사 기준을 거쳐야만 합니다.
세탁을 한 후에도 여전히 불에 타지 않는지 평가받아야 했고, 그래서 약 600~800도의 온도에서 테스트를 받아야 하죠.
지퍼, 장갑, 양말 그리고 헬멧 내피와 내의까지...모두 똑같은 테스트를 거쳐야만 비로소 레이싱 수트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과거에는 스폰서의 로고가 모두 천을 잘라 박음질하는 식으로 부착됐다면, 오늘날에는 모두 인쇄 방식으로 부착되기 때문에 박음질로 인해 발생하는 섬유의 손상도 막을 수 있죠.
물론 스폰서들의 로고도 흐트러짐 없이 아주 깨끗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됐습니다.
폴로셔츠부터 우주비행사의 우주복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죠?
하지만 지금의 레이싱 드라이버들이 입는 레이싱 수트가 최종 완성이라고는 누구도 말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더위와 땀에 시달려야 하니까요.
불편이 있으면 언제나 개선책도 나오기 마련이었습니다.
아마 10년 정도가 더 지나면 오늘날과는 또 다른 레이싱 수트가 등장할지도 모를 일이죠!